나는 바다를 건너가는 노루를 한 번 더 보기 위해 매일매일 창가에 서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기를 바라면서 기다릴 것이다.
─ 임솔아, <그만두는 사람들>
임솔아의 단편 <그만두는 사람들>의 시공간은 문턱의 시공간처럼 보인다. 주인공은 이 문턱을 넘어가지도 혹은 다시 돌아 나오지도 않는다. 대신 그 안에서 하나 둘 규칙이 만들어진다. 유리문을 열기 전에는 노크를 하고, 정원에 갔다가 장을 보고 강아지를 만나고 온다. 이메일을 쓰고, 해가 지면 바다를 건너가는 노루를 기다린다. 일상에서 비켜나 있기 때문에 이렇게나 굴러가는 이 생활을 지배하는 마음은 그만두고 싶지 않다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건 이후로 나는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억지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 변해갔다”라거나, “그만두고 싶다는 사람과 함께 할 때가 나는 편안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금세 친밀감을 느꼈다” 같은 말들은, 주인공의 행동들과 겹쳐두었을 때 실은 정말 그만두고 싶지가 않아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처럼 보인다.
내가 어떤 일을 과도하게 헌신적으로 할 때, 사실 그건 언제든지 그만둬도 괜찮도록 한 발을 빼둔 것 같아 보인다고 이야기 해 준 것은 친구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만두는 것도, 그만두지 않는 것도 잘 하지 못했다. 내내 그 두 가지 일 근처에서 머뭇거렸다. 좋아하는 소설 주인공 바틀비가 떠오른다. 무섭도록 성실하던 필경사 바틀비는 어느 날 이상한 말로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그만두지 않는 것도 아닌 상황을 만들어버린다. 유명한 말,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를 내뱉고 난 후, 바틀비는 말하자면 임솔아의 주인공처럼 문턱에 오른다. 그리고 계속 출근을 한다. 질려버린 고용인이 바틀비를 내버려두고 회사를 옮길 때까지. 그러니까 핵심은 계속 한다는 것에 있는 것이다. 문턱에 올랐더라도, 혹은 문턱에 올랐기 때문에 계속 한다는 것.
새해부터 자꾸만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울컥 차올랐다. 이 마음은 전혀 낯선 것도 아니지만 견디기 쉬운 것도 아니다. 무언가 유예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매순간 나를 사로잡았고, 이제 와서는 누구도 내 미래에 대해 가타부타 하지 않아서 안도를 할 법도 한데 오히려 그 점이 나를 조급증 나게 했다. 이제 누구도 나에게 일인분의 성인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걸까? 왜 어떤 어른도 나에게 결혼에 대해서 묻지 않을까? 왜 아무도 내 미래에 대해서 묻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이십대부터 나는 바로 이 순간, 그러니까 누구도 나에게 생애주기에 따른 조건들을 갖추기를 요구하지 않는 이 순간을 꿈꿔왔던 것 같은데 왜 그것이 이루어지자 정작 내가 불안해지는 걸까? 왜 나의 물질적 조건과 정신 상태는 여전히 이십대 때와 똑같은 것 같지? 그만두고 싶지가 않아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가진 채로 시간들이 흘러갔다. 그만둔 것도 그만두지 않은 것도 아닌 채로, 시간을 죽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날들이 흘러갔다.
전환은 생각보다 가볍게 일어난다.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같은 세미나를 하는 선생님으로부터 파일 하나가 도착해있었다. 참고문헌을 정리한 스무 페이지가 넘는 문서 파일이었다. 개강 선물이라고, 같이 힘내서 공부하자는 선생님의 말은 이상하게 너무 정확한 위로가 되었다. 너무 정확해서 신기할 정도였다. 그 목록들을 언제 다 읽을지 모르겠고 정말 다 읽을 날이 올까 싶기도 했지만, 그건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그만두는 사람들>의 주인공은 단 한번 수업을 같이 들은, 지금은 타국에 있는 누군가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혹은 주고받기 위해 문턱의 시간들을 건넌다. 무엇을 붙들 것인지 정하는 것은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벌여놓은 일들과 내가 만들어놓은 상황들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매일 조금씩 가다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조금 무기력하고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을 다스리는 법은 역시 그만두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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