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료 이후 조용하지만 내적으로는 폭풍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무엇보다 벽 없는 한계에 부딪치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고 있다. 사실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아이디어나 글로 쓰고 싶은 문제의식들이 더 솟구친다기보다는,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어떻게 구체화할지, 어떤 관점으로 가져가야 할지의 문제에서 더 고민하게 되고, 여기서 지난한 과정을 많이 겪는 중이다. 학위과정에 들어올 때부터 가진 콤플렉스 비슷한 것들이 있는데, 오늘은 그런 것들에 대해 칼럼 지면을 빙자해서 칭얼거림과 마음 다잡기의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개인적이고 자학적이며 질투어린 이야기가 많겠지만 어쩔 수 없다(우리 지면은 그런 이야기조차 할 수 있고 해야 되는 공간이라 믿는다).
과정생일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쭉 ‘연구자의 역량’이라 부르는 것들에 대해 스스로 많은 한계와 고민을 느끼고 있다. 연구자가 활동하고 토론하고 일하는 일상을 보내면서 기본적으로 소화해야 하는 여러 능력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사실은 엄청나게 많은 레이어를 가지고 있음에도 ‘우수성’ 혹은 ‘탁월함’이라는 애매모호한 종합적 용어로 뭉뚱그려진다고 생각하고, 종종 ‘연구실적’이라는 전혀 결이 다른 결과주의적 수치로 환원된다고 생각한다(그래서 실적 중심의 위계로 이루어지는 학술체제의 질서에 더더욱 동의할 수가 없다). 이미 이 영역에 ‘실무’라는 문제가 깊게 들어와 있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예전에 쓴 적이 있으므로 순수하게 학술적인 차원에서 연구자에게 요구되는 능력들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겠다.
여러 일상을 보내며 그러한 능력들의 필요와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첫째는 특히 코스워크 때부터 시작되었던 ‘텍스트의 이해와 독해’라는 문제다. 당연히 학습과 독해는 평생에 걸쳐 수행하고 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론/관점의 서로 다른 계보와 계열화’라는 문제를 의식하며 텍스트를 입체적으로 독해하기는 쉽지 않고, 그 전까지 훈련받은 기초적인 지식이 없다면 일차적인 독해에서부터 막힐 때가 많다. 박사과정 첫 학기에 문화연구 개론 텍스트의 간단한 챕터 하나를 네다섯 시간 동안 보다가, 서른 페이지도 채 진도가 못 나가서 너무 답답하고 속상해서 울었던 적이 있다. 한 주에 최소 200페이지 이상을 읽거나 책 한 권을 떼는 수업도 많았기에 얼른 쪽글을 쓰고 다른 수업 준비를 해야 되는데, 기본적인 문장에 대한 이해조차 할 수 없고, 주어진 시간 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게 괴로웠다(이 모든 이론과 저서의 계보들이 내게는 너무도 생소했고, 그때까지도 텍스트를 읽는 법에 대한 요령을 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때 가지게 된 독해에 대한 어려움이 수료한 지금 해소되었냐 하면, 오히려 어떤 부분에선 강화된 것이 문제이다. 여전히 하나의 텍스트조차 세 번 이상을 봐야 그나마 기본적인 논지만 이해할 수 있고, 여러 번 정리해둔 책도 다른 일을 한다고 한두 달 안보면 금새 또 기본적인 내용까지 까먹고 기억이 휘발되어 버려 난감해진다(머릿속엔 텍스트의 소재와 나이브한 한줄요약 주장 정도만 남아있다). 가끔은 연구자라기보다는... 연구자가 되고 싶어하는 금붕어가 아닌가 싶을 때도 많다. 수료생으로서 제한된 타임 리미트 안에 내가 논문을 통해 해내야 하는 개념에 대한 독해와 이론적 관점 정립, 이론들의 계열화라는 문제는, 여전히 파편적이기만 한 해독들 사이에서 무거운 과제로 남아 있다.
둘째는 ‘작문’이라는 문제다. 수백 번의 정리와 발제문과 온갖 에세이들을 썼지만 아직도 하나의 문장을 쓸 때도 억겁의 시간이 걸린다. 초벌까지 다 써놓은 논문 하나를 개작하는 데 두 달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개인적으로 가진 게으름과 완벽주의 성향도 한몫한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어떻게 써야할지 스스로 납득하고 이해되기 전에는 도무지 요약을 할 수가 없다. 생각한 게 정확한 문장, 적확한 어휘로 나오지 못해서 또 고통을 받는다(‘아, 이걸 어떻게 나만의 방식으로 잘 표현하지’. ‘이 단어는 내가 말하려는 이 뉘앙스가 덜해서 정확한 표현이 아닌데...’ 의식과 현상/언어의 괴리라는 영원한 진자운동). 노련한 선배 연구자들 중 일부는 오랫동안 고민하고 생각해 왔던 주제로 투고할 때 한번 ‘삘’을 받아 다다다 써내려가고, 기본적인 논지를 재검토하는 수준에서 손을 크게 대지 않고 원고를 마무리하는 모습도 봤다. 그 경이로운 생산력이 부럽기도 하지만, 저런 게 도대체 오랜 노하우와 요령 같은 걸 통해서 과연 얻어질 수는 있는 것인가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발표와 의견 제시’의 문제다. 자유로운 의견 나눔이 삶의 일상이었던 사람과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교육과정과 연구문화의 일상에서 겪게 되는 괴리들이 있다. 일전의 칼럼에서 발표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대본을 쓴다는 이야길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노트북과 같은 기술적 장비들이 내 삶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언젠가부터 대부분의 세미나나 간단한 회의에서 해둘 말까지도 전부 대본을 타이핑해 버릇하는 습관이 생겼다(타이핑하는 버릇을 들이기 전, 나는 대부분의 자리에서 누가 이름을 직접 지적하지 않는 한 내 생각을 밝히거나 질문을 한 적이 거의 없다). 이 사소한 모든 것들이, 내게는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면 아직도 대단히 어려운 일들이다. 발표를 할 때도 대본을 보면서 속으로 해야 할 말들을 정리하기 때문에, 화면을 보는 순간에는 참여자들과의 아이컨택이 떨어진다. 중요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모먼트들이 삭제된다. 스스로 가진 매우 큰 패시브 디버프라고 생각한다.
넷째는 ‘진행과 상호작용’의 문제다. 최근 스스로 이끄는 장기적인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고민하게 된 바다. 이끔이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 어려운 일이다. 한번 읽은 텍스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요점을 잘 파악하고 요약해서 ‘진행’한다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를 느낀다. 오래전까지 학술행사에서 내가 혹시라도 맡게 될까봐 가장 큰 부담을 느끼면서도 경외했던 위치는 발표자도 토론자도 아닌 ‘사회자’였다. 스스로 요약하고 정리작업을 잘 하는 것이랑, 그것을 다른 사람 앞에서 프리젠테이션하고 잘 설명하는 것, (거기에서 일차적으로 내게 주어지는 긴장을 한 켠에 밀어놓고 잘 관리하는 것까지 더해), 그 이후에 이어질 상호관계들을 생각하고, 토론 발화자의 말을 취지에 맞게 적절하게 요약하고 내 생각을 보태면서 이후의 말을 준비하고 말을 꺼내는 것. 이 태스크들은 한 번에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각자 요구되는 세부 능력이 매우 다른 단계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진행자는 그 너댓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한다.
수년 간 그것을 연습해 왔지만 아직도 유연한 진행에 계속해서 실패한다고 느낀다. 순간 말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를 난감해서 어물거려 버리고 순간 다음 주제로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잊는다. 발화자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이해가 잘 안 되거나, 거기에 어떤 대답을 준비해야 할지 순간적인 정리가 안되어 자주 당황하기도 한다. 분명 무수한 훈련과 노하우를 통해 관성화될 수 있을거고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임하고 있지만, 종종 다른 연구자들을 만나면서 매우 놀랐던 것은(!) 이런 게 어떤 누군가에게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할 수 있거나 애초에 특유의 순발력을 발휘해 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준비할 게 뭐가 있나’ ‘그냥 그 자리에서 요약할게’ ‘피피티 보고 하면 돼’라고 간편하게 이야기할 그 과정이, 내게는 그렇지 않다는 걸 생각할 때, 수행해 온 전형적으로 오래된 자학과 긴장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작업 패턴과 일상의 관리’라는 문제가 있다. 뭘 하더라도 물리적 시간과 공을 많이 들일 수밖에 없는데, 한 번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 글쓰기와 작업의 문제에 대해, 아주 성실한 연구자들은 ‘하루에 30분 논문쓰기’를 제안해 주기도 했었다. 하루에 시간을 정해 놓고 한 문장씩 혹은 한 페이지씩이라도 써보라는 것이다. 몇 주간 그렇게 해보다 그게 내게 그다지 안 맞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써야겠다는 판단이 서고 이전 맥락과의 연장선상에서 받은 이해와 아이디어가 바로 기동력에 보탬이 되어야 그 다음 단계를 나갈 수 있는 것인데, 하루에 한 장씩 쓰니 그 조건이 자꾸 끊기고 잊어버린다(다시, 의식과 언어의 괴리. 쓰던 당시에 남긴 미완의 문장들은 그때 했던 고민을 결코 쉽게 재현해 주지 않는다). 그렇게 억지로 한 페이지씩 썼던 글들이 다음날 기묘한 불쾌감으로 전부 삭제되는 경우도 많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하루에 30분을 들여도 한 문장도 못 쓰기 시작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신체와 정신의 피로도는 시간을 들인 만큼 보답해서 찾아오는데, 기간 내 속력이 잘 붙어주지 않거나 원활히 연결되지 않을 때 얻게 되는 난점은 무엇으로 커버할 수 있을까. 나 역시 ‘이해’와 ‘발동’이 되어야 글을 쓸 수 있는데, 이해와 발동이 생각보다 빠른 시간 안에, 혹은 내가 정해놓은 시간 동안에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하나의 글을 붙잡으면 며칠을 두문불출해 꼬질꼬질한 몰골로 밤을 새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래서 통한의 역작이 나왔으면 좋았겠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건강이 안 좋아지는 것은 물론이요 그 시간 동안엔 일상적인 패턴이 모두 무너진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건 정말 좋지 않은 생활습관인데, 글 쓰는 습관, 일상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를 진지하게 마주해야겠다는 고민과 걱정이 든다.
걸음이 느리고 잘 잊어버리는 연구자는 이런 식으로 고통을 받는다. 이런 생활이 석박사 도합 7년 이상 계속되니 질문이 생겼다. 속도의 차이는 계속된 노력으로 얼마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일까. 연구자들에게 쉽게 공유되는 ‘노력의 신화’는 나에게 한 줄기 희망이었고, 실제로 주변의 동료들이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해 왔지만, 나라는 개인에게 있어서는 솔직히 지금까지 반쯤은 불확실성의 영역이기도 한 것이다. 게다가, ‘네가 과연 충분히 노력하긴 했냐’는 자기규율적인 질문이 옆구리를 찌르고 드는 한편, (학계 버전의) ‘노오력’과 ‘성실함’에 대해 평소 가지고 있던 비판적인 반감들까지 가세해 버리면 여러 가지 복잡함 속에 빠지고야 만다.
동료들은 ‘오히려 너무 빨리 이해하고 빨리 쓰는 연구자가 있다면 제일 먼저 의심해봐야 한다’며 격려해 준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믿음을 갖고 산다. 그러나 이 ‘수료 기간’이라는 학위상태 혹은 사회적 위치에 따른 실존적인 고민들은 종종 그런 믿음까지도 넘어선다. 노력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배로 들 수밖에 없는데, 논문 작성까지 내게 남은 시간이 충분히 그런 것들을 허용해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아무리 부정해도 밀려들어 버리는 날엔, 수면장애를 쉬이 겪기도 한다. 이 기간은 확실히 여러 방식으로 인간이 가장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기간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게 된다. 도대체 연구활동의 일상을 유지시키는 사소해 보이는 이런 것들이 ‘연구 역량’이 아니라면 무엇이지? 좋은 아이디어로 정합한 방식의 논문을 써서 차별화된 결과물을 내는 것만이 연구 역량인 것일까? 많은 학계의 미승인자들이 이런 일상에서 요구되는 역량들을 어떻게 강화해야 할지 무의식적으로 고민하면서, 이 모든걸 그저 실적을 위한 ‘준비’ 내지는 ‘수련’과 비슷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산다. 그러나 애초에 이런 일상을 집중적으로 잘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은 일정 부분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역량을 이미 발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역량들이 종종 세부적으로 분류되지 못하거나, ‘결과물’에 앞서 논의되지 못하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소양이라고 판단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진단은, 한 사람의 연구자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데 있어서 타당한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더 나아가서, 대학이라는 기관과 그 안팎의 네트워크들은 이런 기본적인 ‘연구 역량’의 레이어들을 세부화된 수준에서 접근하거나 체계적으로 교육/재생산하고 있는가? 만약 이것이 쉽게 측정될 수 없는 지극히 암묵지적인 역량이라면, 이런 역량들의 함양이나 재생산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연구자의 (잠재적) 역량’을 평가하여 지원한다는 각종 행정적 지원체계 시스템들은 사실상 이런 역량들을 절대 실질적으로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건 지원계획서에서의 문자화된 어필 따위로는 도저히 환원될 수 없는 지극히 ‘비문자적인’ 수치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상당히 많은 시간을 ‘기본적인 역량’이 될 수 있을 때까지 유지하는 것과 다른 일을 하느라 들여 왔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언제쯤 많이 늘었다고 자신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 졸업 이후에는 그런 것을 느낄 새도 없이 더 빠르게 그 사이클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지금의 고민에 대한 답은 사실 지금 내릴 수도 없는 것이고, 결국 사후적인 판정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하겠다고 했으니 뚜벅뚜벅 걸어나갈 수밖에 없지만, 그저 이런 방식으로 들였던 시간들이 더는 발목을 잡지 않는 수준에서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요즈음이다. “불안하지만 불행하지는 않은” 방법들도 여러 방식으로 찾아보는 중이다. 예전에 동료가 공유해 주었던 허니제이와 김연아와 태연의 명언들을 떠올리면서 또 하루를 지내 본다. ‘못 하겠어 하기 싫어, 어쩌지? 그래도 어떡해.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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