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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기] 사람을 사회 성원으로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문재인 정부는 출범과 함께 청와대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을 내걸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일자리를 국정운영 중심에 놓겠다”고 언급했다. 인수위원회가 마련한 110대 국정과제 문서를 보면, ‘일자리’는 52회, ‘취업’은 22회, ‘창업’은 43회 등장한다. 나라님들뿐 아니라, 온 국민이 일자리 중요한 것은 다 안다. 부동산, 저출생 등과 함께 국가가 해결해야 할 제1과제로 늘 일자리가 꼽힌다. 우선적으로 필요한 청년정책으로도 주거와 일자리가 늘 1, 2위를 다툰다.

그러나 정부는 이 문제를 제대로 해소한 적이 없다. 2003년 노무현 정부에서 청년실업대책 특별위원회가 설립되고 관련 법이 만들어진 이후로, 재정지원 직접 일자리, 직업훈련, 고용서비스, 고용장려금, 창업지원 등 노동시장 정책수단이 총동원되었고, 2019년에 이르면 연간 청년 대상 일자리 정책 국가사업비만 3조 7,834억 원에 달했으나 실업률에는 특별한 변동이 없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실업률이 심지어 적극적으로 관리된 수치라는 것이다.

관리의 핵심에는 공공이 비용을 대는 각종 단기 일자리들이 있다. 공공기관에서 근무하거나 공공이 지원하는 비용으로 중소기업, 사회적경제 기업, 시민단체 등에서 근무하는 11개월 이하의 계약직 혹은 시간제 일자리 근무자들은 취업자의 숫자를 일단 늘리지만, 여전히 노동 불안정성의 지대에 놓여 있다. 이들의 경험에는 구체적인 근무지와 업무, 인간관계 등에 따라 편차가 있겠으나 많은 경우 모멸감이 동반된다. 실제로는 일감이 없어 출근해 멀뚱거리다 집에 돌아오거나, 어차피 조만간 나갈 사람이라 여겨 일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등의 업무배제가 대표적인 이유다. 즉, 회사에 있으나 성원권은 없는 구성원이 이들의 존재 양식이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 문서를 보면 일자리 정책에서 약간의 방향 전환이 예고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일자리를 몇십만, 몇백만 개 만들겠다는 식의 목표 설정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문서 곳곳에서 일자리를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주도로 만들게 하겠다는, 또 복지 제도를 일자리에 연계시키겠다는 정도의 (신)자유주의적인 의지가 엿보인다. 윤 정부의 일자리/복지 관련 국정비전은 ‘생산적 맞춤복지’로 “일을 통한 복지가 최고의 복지”라는 문구는 이 정부의 근로연계복지 방향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구체적인 근로연계복지의 정책수단은 ‘내일채움공제’, ‘근로장려세제(EITC)’와 ‘국민취업지원제도’로 지난 정부의 방식을 그대로 이어간다.

흥미로운 점은 도대체 그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어서 복지로 잇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방안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체로 ‘산업을 육성’하고 ‘혁신’하면 ‘민간 주도 일자리’가 생길 것이라는 구호 정도, 그리고 ‘제조업’, ‘바이오헬스 분야’, ‘서비스 산업’ 등을 주요 영역으로 지목한 정도가 보일 뿐 그 구체적인 방향이 제시되어 있지는 않다. 특히 정부 국정과제에는 산업을 자동화시키고, 한국을 로봇 강국으로 만드는 일도 포함되어 있는데, 최근 대체로 산업 육성과 혁신이 사람을 고용하기보다는 해고하는 쪽과 연결된다는 점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큰 그림을 가지고 볼 때 역대 정부의 일자리 정책이 모두 결여한 것은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 아닌가 싶다. 일자리는 결국 일을 하는 사람에게 사회가 내어주는 ‘자리’인 만큼, 거기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의 권리와 역량을 인정받고 자기를 실현하는 경험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정부가 실업이라는 현상뿐 아니라 실업자라는 사람들까지 처리해야 할 문제 덩어리로 바라보는 이상 이들에게 만족스러운 자리가 주어지기는 힘들다. 좋은 일경험을 하기 힘든 단기 일자리로든, 몇몇 성장하는 산업 분야의 일자리로든, 아니면 ‘일하지 않는 자에게는 복지도 없기’ 때문에 가야 하는 아무 일자리로든, 사람들은 그저 일단 단기적으로 배치될 뿐이다.

참여자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었던 일자리 정책의 사례로 나는 ‘청년수당’을 들고 싶다. 청년수당은 전통적 의미에서도, 행정적 의미에서도 일자리 정책이 아니다. 참여자가 수령하는 월 50만 원의 수당을 반드시 취업 준비에 직접적으로 연계된 항목에만 지출할 필요가 없다. 서울시 청년정책 체계도에서 이 사업은 ‘일자리’가 아닌 ‘설자리’ 분야에 편성되었으며, 제도를 설계한 이들은 청년수당을 실업률 감소를 위한 징검다리로 보기보다는 미취업자에 대한 실업부조의 성격을 지닌 소득보전 사업, 청년기 소득불평등 개선을 위한 사업 등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최초 설계 시의 고려와는 다르게 이 사업은 다른 지자체나 중앙정부로 확산하면서 일자리 정책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다. 취업 준비에 직접 관련된 항목에만 지출을 할 수 있게 제한하는 사례도 많아졌고, 단기 일자리 인턴 경험과 청년수당을 연계하는 근로연계복지로 수당을 설계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중앙정부에서는 관련 사업의 명칭을 아예 ‘구직활동지원금’으로 두었다가 ‘국민취업지원제도’로 변경하여 통합하였으며, 서울시 청년수당도 제도 정당화 근거 마련을 위해 참여자들의 취업률 제고 현황이나 취업 역량 강화 통계를 보고하였다.)

일단 취업자로 이행하는 것을 단기적 목표로 삼지 않는 청년수당과 같은 정책이 앞서 살펴본 단기 일자리나 근로연계복지 등보다 더욱 훌륭한 일자리 정책일 수 있다고 보는 까닭은, 장기적 관점에서다. 오늘날처럼 노동에 필요한 세부적인 기술이나 지식이 계속해서 역동적으로 변하는 사회에서는, 어차피 다수가 1~2년 일하고 그만두게 될 직업에 관한 준비와 훈련보다는 사회를 장기적 관점에서 내다보는 시각이나 새로운 것에 대한 적응 능력을 형성하는 일이 개인의 관점에서도, 기업의 관점에서도 더욱 중요한 역량(competence)일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역량을 겨우 6개월간 300만 원을 지급하는 청년수당을 통해 참여자들이 갖게 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청년수당은 짧은 기간 교육을 통해 바로 현장으로 인력을 보내고, 소진된 인력을 다시 다른 교육에 투입하는 방식의 단기 대처와는 다른 방향의 장기적 일자리 정책의 가능성을 예시한다. 모든 사람을 우리 사회의 골칫덩이가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개발하고 발휘할 수 있는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일, 그리고 그 인정의 의미를 담아 투자로서든, 권리로서든 기회를 누릴 수 있게 하는 일은 왜 일자리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걸까? (그 분야 사람들이 아직도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별개로, 현재로서는 ‘창업 정책’에서만 유일하게 그나마 단기 성과로부터 거리를 두는 식의 예외가 작동한다.)

아마도 그 배경에는 선례가 없으면 쉽게 하지 않는 행정 관료제의 보수성, 모든 사업이 단기적인 성과로 수치화되어야 하는 수량화된 통치 방식이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사람에게는 최소한만 투자하고, 무언가 지원받으면 그것에 대한 결과물을 응당 즉각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 ‘정상’인 문화도 포함된다. 조금 샛길로 새며 마치는 것이지만 오늘날 연구자들이 살아가는 연구지원의 세계도 별다른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존중받지 못한다는 감각뿐만 아니라, 이 동네에는 미래가 없다는 감각도 늘 함께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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