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도 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과 대중문화 텍스트, 계속해서 사건들을 마주하는 삶의 몇몇 국면 속에서 ‘냉소하는 주체’들을 쉽게 만난다. 이것은 90년대 이후에는 현대 사회의 시대정신처럼 표현되기도 했고 2000년대 후반부터는 소위 청년 혹은 인터넷 세대의 감정구조처럼 호명되기도 했다. 현재의 웹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놀이문화의 많은 코드도 대상을 불문하고 무언가에 대한 냉소와 해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것이 세상에 무언가를 기대하고 그 기대의 결과물을 여러 번 받아 본 우리에게 익숙한 종류의 정서임은 분명하다.
이 감정은 기본적으로 단독의 개인이 타인과의 관계나 변화가능성을 차단한 채 세계에 대해 심리적 거리를 두는 태도로 해석된다. 하여 냉소하는 사람에 대한 세간의 평가 역시 결코 좋을 수가 없는데, 지나치게 효율성을 따지려 든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나르시시즘적 인간이라는 지적이 있는가 하면, 무언가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점에서 비생산적, 보수적, 허무주의적인 인간과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또 냉소하는 사람은 구체적인 대화 상황에서 어떤 ‘위치 점하기’를 의식적으로 수행하는데(그래서 냉소하는 사람에게는 타인이 필요없어 보이지만 냉소의 수행에는 역설적으로 타인이 필요해진다), 그 과정이 삶에 대해서든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든 어떤 지적인 차이를 동원하고싶어하다 보니 이들은 인격적으로도 (‘꼬였다’던지 똑똑한 척 해서 ‘재수없다’는 종류의) 비난을 듣기 일쑤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편안한 인지도식을 만들고 확증편향에 갇히길 좋아하는 부류의 인간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각각의 맥락에 따라 냉소라는 것 자체가 다의성을 띄지만, 단순히 냉소를 도덕적인 평가의 대상으로 삼기 이전에 어떤 주체의 어떤 상황에서 냉소가 생겨나는지, 냉소를 구성하는 복합적인 맥락과 효과는 무엇인지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아마도 냉소하는 주체를 전면에 드러내고 그의 시선과 가치관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작품으로 소설가 은희경의 90년대 소설들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시선으로 풀어내는 세계관은 꽤나 설득력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해서 사회생활을 갓 시작할 무렵의 나 역시 은희경 소설 속 인물들에게 정말 많이 빠져들었다.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의 분리나 낭만과 사랑, 절망과 슬픔에 대한 한 걸음 뒤에서의 비판적 관찰, 과도한 이입이나 과잉해석에 대한 경계, 짐작과는 다르게 우연으로 점철되는 삶의 필연적인 배반 같은 장치들은 냉소를 구성하는 삶의 다양한 맥락들을 잘 보여준다.
이런 냉소들은 보통 삶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태도로부터 나온다. <새의 선물>에 나왔던 주인공 진희가 열두 살 나이에 삶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냉소하는 주체는 모든 삶의 진실들에 통달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나 많은 가능성과 몇 수 앞을 끊임없이 생각하기에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의연하게 빠져나가고자 하는 탄력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삶에 대한 앎과 어떤 득의양양함(?)을 완전히 근거 없는 허위나 허세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여기에는 주체의 엄연한 삶의 단면들로부터 비롯된 부분적인 ‘경험적 진실’이 있고, 그것들은 진위를 판단할 수 없고 함부로 해서도 안 되는 종류의 것이기도 하다.
냉소하는 사람이 세계를 마주하는 방법은 주체가 아닌 관조자의 위치로 시선을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 시선에는 달관한 사막여우스러운 느낌과 함께 인간 삶의 허위나 가장을 포착하는 특유의 해학이 깃들어 있어서 그것을 쭉 따라가 보는 것 역시 재미있는 일이 된다. 그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계 역시 동태를 살피고 위험에 대비하는, 다수의 분기점과 엔딩이 있는 전략게임을 하는 플레이어의 시점처럼 그려진다. 이렇게 여러 사정을 거쳐 탄생한 ‘냉소하는 사람’은 낭만이나 이상과 같은 가치들에 결코 빠져들지 않고, 쉽게 상처받지도 않을 것만 같다.
그러나 은희경 소설의 통찰력은 냉소의 뒷면에 대한 직시로, ‘보여지는 나’를 ‘바라보는 나’를 다시 바라보는 지점에 독자들을 배치시킴으로써 그 허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냉소라는 감정의 이면에는 두려움이 있다. 상처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그로부터 발생되는 모든 피로들을 감당하고 싶지 않아, 이 행복이 깨져버릴 상황들을 분연히 수십 번씩 시뮬레이팅하고 각인시킨다.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는가’를 주제로 한 수많은 플롯들을 나의 삶 속으로 테라포밍하는 것이다. 삶에 있어 어떤 엔딩이 나오더라도 크게 동요하고 상처받을 필요가 없다는 그 가치관은 실은 삶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영원히 지속되는 일종의 ‘전시상황’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삶이란 장난기와 악의로 차 있다. (...) 너무 기쁨을 내색해서도 안 된다. 그 기쁨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삶의 악의를 자극하는 것이 된다(<새의 선물>)”.
이런 점에서 본다면 냉소는 주체가 ‘어찌 할 수 없는’, 생존을 어렵게 만드는 무저항의 세계 속에서 살아남고 싶어 하는 주체가 보이는 생리적인 반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냉소는 실제로 무언가를 모두/이미 안다기보다는 안다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믿음에 수동적인 자기보존의 전략이 결합된 기제에 가깝다. 나의 자아를 여러 개로 분리하거나, 알 수 없는 삶에 대해 대략의 결론이라도 내려 놓으면, 최소한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것은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냉소하는 주체 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모순적인 균열이 일어난다. 아주 완벽해 보이는 몇몇의 냉소하는 주체에게서는 날개를 한껏 편 불안한 공작의 위용과 꺾인 적이 있거나 꺾일까봐 날개를 부여잡고 있는 어떤 흔적 같은 것들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타인에게 말 걸기>에서 여자가 '벌어진 눈'으로 남자를 꿰뚫어 본 것은 그러한 냉소의 이면이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그렇게 냉정하게 살 수 있는 거지? 사실은 너도 겁이 나서 피해버리는 거 아니야?”
냉소가 애초부터 피도 눈물도 없고 무관심한 주체가 합리적으로 선택한 정서라기보다 내가 세계에서 어떤 최초의 '좌절'을 겪었다는 지표이자 어떤 ‘외상에 대한 위악’을 보여주는 징후라면, 그것이 발생한 사회적인 맥락과 냉소하는 주체들의 위치성을 잘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냉소 사회’라는 이름으로 책이 출판되었을 정도로 사회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이 감정을 주목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냉소’는 정치적 냉소주의의 맥락에서 소환되며 특정한 집단이나 범주의 감정으로 상상되고 그 집단에게 도덕적 주문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용된다. 그러나 냉소를 공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그 자신의 경험적 진실과 함께 냉소의 수행적 효과를 구성하는 외부적인 차원들의 힘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냉소를 단순한 저항정신의 결여라고 비판하기 전에 ‘불안정성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질문해야 할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냉소 혹은 냉소 이후를 보다 적극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새의 선물>에서 진희가 세계를 냉소하기 위해 이전과 이후 단계에서 수행하는 전략들이, 비록 완벽한 답이 되지는 않지만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을 것 같다. 진희는 ‘금기’에 대한 고통과 집착을 버리는 훈련의 일환으로, 보기만 해도 구역질나는 벌레를 징그럽다는 감정이 없어질 때까지 부릅뜨고 바라본다. 잘 들여다보면, 진희가 수행하는 냉소에는 과거나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포나 고통을 ‘직시’하는 과정이 연결되어 있다. 그 고통의 맹점과 맥락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다 알고 나서야/혹은 다 알았다는 믿음이 주어지고 나서야 삶을 견디거나 냉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희는 끝내 벌레를 시시하게 여기게 됨으로써 금기 자체에 대한 냉소에 성공했지만, 냉소하는 주체들에게 이 고통을 직시하는 과정은 이 삶에서 무한히 연장되고 잔존하는 과제로 남을 것이다.
나아가 이 화자는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고까지 말한다. 이러한 냉소는 삶에 대한 단순한 방관이나 무기력한 태도, 혹은 삶의 특정한 부분을 배제하고 수용하는 조건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이는 삶이 주는 우연이나 고난, 기쁨을 자기의 일부로서 인정한다는 점에서 삶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에 가까운 것이다. 이러한 수용방식이 만드는 에너지나 관계성의 방향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겠다. 다만 한 가지 고찰해 볼 만한 지점은, 삶에 대한 냉소를 극단까지 밀고 올라간다면 ‘짐작과는 다른 일들’과 가능성이 생겨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게 되고, 심지어 그것을 추구할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다음과 같은, 하면서도 납득되지 않지만 할 수밖에 없는 기이한 질문을 남기고야 만다: 냉소의 극단이 모종의 ‘사랑’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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