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에서 네 달간 네트워킹 활동을 꾸리며 첫 여름을 보낸 나의 개인적인 후기이자 올해를 포함한 문화연구캠프들에 대한 부분적인 생각들이다.
당초 신문연을 같이 운영하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이 네트워크를 처음 시작하면서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것은 다소 소박한 범주인 ‘[(이른바)3세대][미디어]문화연구자들의 만남과 결집’이었다. 나는 전국 각각의 대학으로 흩어진 문화연구자들 중 일부 선생님들의 지도를 통해 미디어 문화연구를 접할 수 있었고, 공부를 시작하고 진행하는 동안 ‘어느 연구공간(이때의 공간은 예외 없이 대학이다)에서 문화연구를 전공하는 모 학자(이때의 학자란 언제나 전임 교수이다)의 담당 학생들’ 정도로 학문적 네트워크가 한정되는 상황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사회학과 인류학을 포함한 더 넓은 범위에 ‘걸쳐 있고’ 그 걸쳐 있음을 전략으로 사유한다는 문화연구의 간학제적 성격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어디에도 있는 것 같지만 막상 찾아보면 얼굴 한 번 마주치기도 어려운 ‘연구 동료’를 교수님 연구실 바깥에서 만나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하는 또래 연구자들을 만날 만한 곳은 1년에 한 번 열리는 문화연구캠프 정도였다. 캠프를 하고, 열심히 하루 동안 성찰을 하고, 술을 먹고 헤어지면 그런 한여름 밤의 ‘지적 조우’는 내년으로 기약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대학 안에서의 학문적 관계 맺기는 졸업 후 대학을 나서는 순간, 혹은 사정으로 인해 학문하기를 잠시 유예하는 순간, 스스로를 학교 안(밖) 연구자/ 활동가/ 직장인으로 각자를 새로 정체화하는 순간, 각자가 생존을 위한 각개전투에 돌입하면서 너무도 쉽게 고립화되었다. 각 대학에 흩어져 고립된 문화연구자 개인에게 대학의 경계로부터 한정된 네트워크가 주는 상실감은 적지 않았고, 그를 뛰어넘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어쨌든, 각자 어디에서 무엇을 고민하는지, 아니 거기에서 살아는 계신지, 만나고 싶다는 것이 신문연에 참여할 당시의 나의 바람이었다.
여름방학 동안 신문연의 첫 사업인 <연합신세G>를 진행하면서, 나는 그렇게 내가 기존에 생각하던 ‘미디어 문화연구’의 범주를 한참 넘어서는 ‘문화연구’ 또는 ‘문화적인 것’에 대한 광범위한 형태의 수요와 갈증이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연합신세G>는 일부 대학원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던 학과 내 신입생 대상 세미나를 학교를 벗어나 진행해 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불가피하게 이러한 세미나는 특정 학교의 제도화된 전통이라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다양한 주제로 세미나를 꾸리고 이러한 세미나를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연구생들이나, 학교 바깥에서 문화연구에 관심을 가지는 다양한 사람들이 수강 대상이 되었다.
나는 동료와 함께 석사 때 공부했던 도시공간연구를 소재로 ‘연합신세G 공간반’을 진행했고 세미나에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는데, 절반 이상은 내가 생각하던 그 ‘미디어 문화연구’의 아득한 바깥에서 왔다. 그 곳에서 커뮤니케이션, 사회학, 인류학, 문학, 지리학, 정책학, 도시계획학을 배우는 사람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각자가 세미나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달랐을 것이고, 모두 만족스럽게 세미나를 끝내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처음 수강자들의 다양한 전공을 보고 스스로 겁에 질렸던(?) 것과는 달리 세미나에서는 각자 공간에 대한 문제의식을 나누어 가는 과정에서 어떤 희한한 ‘캐미’를 느낄 수 있었다. 왜 공간이 쉽게 연구대상이 안 되는지를 함께 토로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공간을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텍스트로 읽어낼 필요성을 논의해 가며, 다양한 전공 베이스 속에서 각자의 문제의식이 연결되거나 교차하는 지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문제를 더 넓은 범주에서 바라보고 성찰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 세미나에 가면 뭔가 생각하면 즐거워지는 문제의식이나 연구 아이디어가 계속해서 떠올랐으니, 내게는 이것이 이번 여름에 얻었던 즐거운 지적 조우이자 향후 세미나를 지속할 원동력을 만들어 준 중요한 경험이라고 느껴진다.
세미나를 종료한 후 우리가 ‘그러할 수 있었던 계기 또는 조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만남들은 순전히 우연한 것이었을까? 여름 동안 신문연을 오고 갔던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해 주었던 얘기들은, “학교에서는 이런 세미나가 열리지 않는다” “이런 내용을 공부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고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미디어 연구 장 속에서 공부하며 언제나 알게 모르게 문화연구의 당위성에 대한 증명을 넌지시 요청받아 오던 입장에서, 너무나 다양한 전공자들이 문화연구에 목말라 하는(?) 듯한 이 상황은 개인적으로 반갑고도 기이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각 학문 분과 속에서 각각의 ‘문화연구자’들이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지, 그리고 학교나 학과의 경계를 넘어서는 문화연구자 네트워킹에 대한 필요성을 각자가 얼마나 강하게 느끼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해 주는 지점이기도 했다. 이번 세미나에서 느낀 즐거움에는 여러 요인이나 조건들이 있었겠지만, 구성원 각자가 문화연구, 문화적 접근, 혹은 문화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분과학문의 경계 또는 한계를 인지하게 되는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형태로 연구관심사를 사유하고자 했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문화연구의 미래를 고민하는 연구자들이 (그 목표가 학문의 생존이든 확장이든) 어떠한 실천을 고려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가 아닌가 한다.
제17회 문화연구캠프의 대주제는 “다시, 3세대 문화연구”였다. 매년 빠짐없이 ‘성찰적’이었던 우리의 노고를 너무 잘 아는 우리는 ‘음, 이제 내년의 문캠 주제는 “(그럼에도) 3세대 문화연구”이겠군’이라며 초연히 농담을 하는 수준까지 이르른 듯하다.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최소한 꾸준하게 복수의 위기들을 논의해 왔다. 사회와 학문의 위기, 문화연구의 위기, 문화연구자의 위기... 학회와 만남의 공간에서 비슷한 아젠다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상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것이고, 매번 반성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도 존재할 것이고, 의식처럼 반성하는 나 혹은 우리의 아득한 고립감에도 또한 여러 이유들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확실히 이러한 상황의 지난함에는, ‘연구하는 삶에 대해 지속적으로 상상할 에너지’를 약화시키는 힘이 있다. 개입된 자로서의 우리에게 ‘반성과 성찰’이 앞으로도 무기한 지속될 주제라면, 좀더 다른 형태의 논의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생각해 보고 있다. 지금은, 어떤 식으로든 지속적인 실험과 실천을 바탕으로 한 상황에서 분투한 결과와 자료들을 가지고 성찰을 시작해야 되겠다는 필요성을 느낀다.
나는 최근에 “문화연구자의 이점은 연구 문화를 구성하는 판 속에 개입하여 불안정한 삶 속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고민과 실천들 자체를 연구문제와 대상으로 설정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스스로 정리해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신문연의 (거창한) 발기인 의견문에서는 “연구자로서의 개인과 사회가 만나는 접점과 우리들이 공유가능한 문제의식의 더 넓은 지평을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리하여' 이번 여름에 만난 사람들, 내 협소한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던 사람들과의 연결은 뜻깊었으며 두 가지 나의 생각과 바람을 조금이나마 이어준 순간들이라고 생각한다. 성찰의 가능 조건으로서 “우선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해 보는 것, 광범위한 영역에 고립되어 있는 문화연구자들을 모으고 이야기를 듣고 “곁을 나누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실천이라고 생각하며, 가을과 겨울 그리고 다음 방학에는 또 어떤 만남과 대화들로 고민하는 삶에 새로운 수를 놓을까 생각하며, 글을 맺는다.
* 물론 이러한 ‘더 넓은 범주의 대안적/대항적 학술공동체’ 같은 것들은 수도 없이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렇게 수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으로 안다. 그러나 없어졌지만 결국 필요한 것이라면, 또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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